꽃이 흐드러지게피어 축제가 한창인 계절에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본인의 도움 요청이 있었으나여러 사정이 겹쳐 취재가 미루어진 가정이었다.
요양병원을둘러싼 나무에서는 새 생명이 움트고, 꽃은 만개하여 봄의 환희를 알리는데 병동 안에서는 생명의 불씨가잦아들고 있었다. 아내의 상태가 좋지 않다며 영태(가명. 50세) 씨는 환자를 만나보겠느냐고 물었다. 병원까지 왔는데 당연하다는 대답에 “그래도 놀라실까 봐요.” 하며그는 머뭇거렸다.
그를 따라병원 복도를 지나는 동안 왠지 모를 싸한 느낌이 들었다. 병실은 대여섯 명의 환자가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맨 구석 침상 옆의 보호자가 일어섰다. 딸을 간호하는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내가 낯선 사람임에도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렸다. 사위가진정하시라고 말을 했지만, “불쌍해서… 불쌍해서 이 노릇을 어떡해요.”떠들던 사람들도 숨을 죽이고 나도 말문이 막혀 눈물만 흘렸다.
눈도 뜨지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신음만 토해내는 환자를 보니, 불현듯 몇 년 전, 꼭 이맘때 암으로 돌아가신 친정엄마가 생각났다. 뼈만 앙상하게 남기까지얼마나 아팠을까? 그 모습을 지켜보는 가족은 얼마나 안타깝고 힘들까?그 고통을 겪었을 환자와 가족이 내가 겪은 일 같아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그동안 15년 이상 취재를 하면서 별의별 사정을 다 보았는데 이렇게 흐느껴 울기도 처음이다.
밖으로나와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할머니는 딸 많은 집에서 태어나 먹고 살기 힘들다고 다른 집의 양녀로보내졌다. 그러나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멀리 이사를 하는바람에 친동기간들과 연락이 끊어졌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부터 남의 집 가정부도 하고 점원, 버스 안내양, 그리고 공장을 전전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식도 못하고아이 셋을 낳고 살았다. 맏이를 병으로 잃고 남매를 키웠는데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남편이 당뇨 합병증으로세상을 떴다. 발가락이 전부 썩어서 잘라내는 수술을 서너 번 했는데 그때만 해도 그 병이 그렇게 무서운줄 몰랐다.
온갖 고생을하며 남매를 키워 결혼시키고 한숨 놓았다고 생각했다. 딸도 아들 형제를 낳아 손자도 생겼다. 전기용품 파는 가게의 점원을 하던 사위가 사장이 이민 가면서 넘긴 가게를 빚을 얻어 인수했다. 그러나 2년도 안 되어 건물을 새로 짓는다는 건물주의 통보를 받았다. 이자 내느라고 가게 보증금을 까먹고 있던 터에 권리금까지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났다. 거기다 딸이 암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릴 들었다.
혼자 살면서겨우 기초생활 수급비로 살아가는 할머니네 좁은 집으로 딸의 가족이 들어왔다. 그런데 설상가상 결혼했던아들이 게임 도박에 빠져 이혼하고 집으로 들어오니 여섯 식구가 누울 공간이 안 되었다. 일용직 일을하는 사위는 밖에서 잘 때가 많았다. 할머니가 아이들을 돌보고 딸은 수술 후에 방사선치료를 하며 투병을시작하였다. 예후가 좋아 3년 만에 완치가 되어간다는 반가운소식도 들었다. 그때부터 딸은 아이들 간식비라도 번다며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지난해 겨울, 딸이 감기몸살이 오래가면서 허리가 아프다고 했다. 일이힘에 부쳐 그러려니 하며 바쁘다고 병원도 안 가고 약만 사서 먹었다. 그러다 몸이 이상했는지 검진을한 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암이 재발하여 온몸으로 전이가 되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고 처음 암 선고를 받을 때보다 더 낙심되었다. 병원에서 포기했으니 민간요법을 써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몸에 안 맞아서그런지 밤새 토하고 기운도 잃어갔다. 그렇게 고생하다가 요양병원까지 오게 되었다.
“통증때문에 제대로 잠을 잔 적이 없어요. 죽으면 안 아플 테니 이제는 아프지 말고 빨리 떠났으면…” 할머니가말을 못 채우고 흐느낀다. 이 비참한 상항에서 무슨 말이 필요할까?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널 딸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물이 마음속의 슬픔 가시가 되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
취재/ 신혜림
※ 취재일주일 후 환자는 영면에 들었습니다. 찾는 사람 없다고 하루 만에 장례를 치렀는데, 제단에 꽃장식도 없이 흰 국화 한 다발이 전부였습니다. 딸을 가슴에묻은 할머니, 아내를 잃은 남편의 눈물, 소리 내어 울지도못하는 어린아이들, 최소한의 예도 갖추지 못한 참으로 쓸쓸하다 못해 아픈 장례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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